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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보는 느낌

조선시대의 명화 2


조선시대의 명화 2

작가 : 작가미상
제목 :
미원계회도(薇垣契會圖)
언제 : 1540년경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
규격 : 93 x 61cm
소장 : 서울 이원기


해설 : 미원 즉 사간원(司諫院)의 계회를 그린 이 그림은. 지금까지 알려진 국내 현존의 문인계회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번중(蕃仲) 성세창(成世昌)의 찬시가 적혀 있고. 또 좌목(座目)에는 당시의 행대사간(行大司諫) 유인숙(柳仁淑). 행사간(行司諫) 홍춘경(洪春卿). 전사간(前司諫) 이명규(李名珪), 행헌납(行獻納) 나세찬(羅世纘). 전정언(前正言) 이황(李滉). 수정언(守正言) 김 ? . 수정언(守正言) 이영현(李英賢) 등의 이름과 직함이 보여 전현직의 사간원 관리들끼리의 모임임을 확인할수 있다. 근경에 쌍송이 서있는 언덕이 있고. 그밑 넓직한 지면에서 의관을 정제한 선비들이 계회를 열고 있는 모습이 작게 상징적으로 묘사 되어있다. 그들 옆에는 큰탁자 위에 술동이들이 놓여있어 자연을 벗삼아 호연지기를 펴던 당시의 선비들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인물과 모임이 이렇게 작게 표현된 반면에 산수는 화면을 그득 메우듯 크게 그려져 있다. 편파(偏頗)구도. 단선점준(短線點皴). 확대된 공간. 수지법(樹枝法)등 모든 요소들이 16세기 전반기 안견파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사실상 이러한 형태의 안견파 화풍이 당시에는 이미 고전양식이 되어 계회도를 비롯한 기록적 성격의 그림들에서 자주 다루어졌다. 이원기(李元基) 소장의 <하관계회도>, 국립박물관소장의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 고화비고(古畵備考)에 실려있는 소세양(蘇世讓) 찬(贊)의 산수도 등은 이 계회도와 상통하는 대표적인 예들이다.



작가 : 작가미상
제목 : 하관계회도(夏官契會圖)및 부분
언제 : 1541년경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
규격 : 97 x 59cm
소장 : 서울 이원기


해설 : 이 하관계회도는 병조(兵曹)에 근무했던 전.현직(前現職) 낭관(郎官)들의 계회를 그린 것으로. 성세창(成世昌)의 찬시가 있어 1541년 가을의 작품임을 알수있다. 성세창은 이보다 1년 앞서서는 미원계회도에도 찬시를 썼음을 알수 있는데 박락(剝落)이 심하여 완전한 판독이 어렵다. 이현보(李賢輔)의 아들로 이 계회의 일원이었던 이중량(李仲樑)의 후손에게 전해오는 하연선조유적(賀淵先祖遺蹟)에는 이 시문(詩文)이 대부분 판독되어 있고 이 계회의 좌목(座目)도 그대로 적혀있다. 참석자들은 행정랑(行政郞) 이약해(李若海). 정랑(正郞) 조언수(趙彦秀). 전정랑(前正郞) 정언각(鄭彦慤). 정랑 황박(黃博). 전정랑 나윤명(羅允明). 행좌랑(行佐郞) 윤부(尹釜). 전좌랑(前佐郞) 이중량(李仲樑). 좌랑(佐郞) 이영성(李永成). 수좌랑(守佐郞) 윤우(尹雨). 전좌랑 이영현(李英賢). 좌랑 이천계(李天啓) 등 11명이다. 이러한 계회도는 늘 화원이나 직업화가가 그리되 참석자수만큼 그려서 나누어 가지고 대대손손 내려가면서 기념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므로 똑 같은 계회도가 또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 이 그림 은 앞의 미원계회도와 구도나 화풍이 대체로 비슷한 안견화의 작품이지만 동일인의 솜씨로는 볼수 없다. 여전히 계회의 장면은 작고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반면에 산수는 크고 중요하게 그려져 있어 당시의 자연애(自然愛)도는 자연중심적인 풍조를 엿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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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작가미상
제목 :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및 부분
언제 : 1531년경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91.5 x 62.3cm
소장 : 일본개인


해설 : 이 계회도는 독서당에서 사가(賜暇) 독서하였던 장옥(張玉). 홍서주(洪敍疇). 허자(許磁). 임백령(林百齡). 송인수(宋麟壽). 송순(宋純). 주세붕(周世鵬)등 12명의 사대부들의 계회 장면을 그린 것으로 1531년경의 작품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현존의 계회도 중에서는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귀중한 작품으로. 조선 초기에 유행했던 계축(契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 시대의 계축은 이 작품에서 볼수 있듯이 상단에 계회도의 명칭을 전서체(篆書체)로 쓰고 중단에는 참석계원들의 성명. 위계. 관직. 등제년(登第年)등 인적사항을 적은 좌목(座目)을 마련하는 것이 상례였다. 또한 조선 초기의 계회도들은 이 작품에서도 보듯이 안견파(安堅派) 화풍을 따라 산수를 크게 그리고 계회의 장면은 작게 묘사하여 고전적인 거비파적(巨碑派的)경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이계회도가 그려진 곳은 중종 10년에 지어옮긴 두모포(頭毛浦) 남안의 호당(湖堂)과 그주변의 실경(實景)이라고 볼수있다. 근경. 중경. 후경의 3단으로 이루어진 구성이 16세기 전반기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이나. 다만 이 작품에서는 대체로 대칭구도를 이루고 있고. 경물들이 옆으로 길게 확산되어 있으며. 그에 따른 공간이 보다 시원스럽게 건개되는 점이 눈에 띠는 차이라 할수 있다. 주산과 언덕들을 묘사함에 있어서 단선점준(短線點皴)을 주로 쓰면서 먹이 묻은 부분과 묻지 않은 부분이 이루는 흑백의 대조를 두드러지게 표현한점도 주목을 요한다.계회는 한강(漢江)에 떠있는 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계원들이 모두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있고. 또 그옆에 따르는 작은 배에는 별도의 술동이가 실려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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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작가미상
제목 :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및 부분
언제 : 1570년경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102 x 57.5cm
소장 : 서울대학교 박물관


해설 : 이계회도는 명종(明宗). 선조(宣祖) 연간에 사가(賜暇) 독서하였던 문사 들의 모임을 기념하여 제작한 것이다. 참여인물은 윤근수(尹根壽). 정유일(鄭維一). 정철(鄭澈). 구봉령(具鳳齡). 이이(李珥). 이해수(李海壽). 신응시(辛應時). 홍성민(洪聖民). 유성룡(柳成龍)등 9명으로 모두 당대의 명현들이다. 이중 세상을 가장 일찍 떠난 정유일의 경우로 보아 1570년 전후인 선조연간 초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계회도는 앞서 중종 때에 그려진 것과 기본적인 골격은 같은 양식인데. 그림의 내용과 구도가 바뀌었다. 즉. 한강변의 넓은 공간을 화면에 담았는데. 여기서는 독서당과 주변의 송림을 중심으로 강안의 경치만 포착하여 가깝게 끌어들였다. 구도 역시 수평식에서 강변 언덕의 능선이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아래로 사선으로 흘렀다. 동호(東湖)의 독서당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 산수도는 초기 화풍을 반영한 것이지만 사생적(寫生的)인 분위기가 잘 살아 있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경외명승첩(京外名勝帖)등 한강변의 명승을 그린 진경(眞景)산수화의 부감식 구도법과 근사하여 주목된다. 이러한 산수 중심의 조선시대 전반기 계회도 양식은 후기에 오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대체로 후기의 시사회(詩社會). 기로회도(耆老會圖)등 기념하는 행사장면이 주된 화재로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계회장면보다 주변의 풍경을 확산하여 다룬 전기의 계회도 양식은 마치 외경(外景)에 신경 쓰느라 인물을 작게 다룬 추보적인 사진촬영법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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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작가미상
제목 : 호조낭관계회도(戶曺郎官契會圖)및 부분
언제 : 1550년경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121 x 59 cm
소장 : 국립중앙 박물관


해설 : 이계회도의 제목이 적힌 상단부가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나. 좌목(座目)을 검토한 결과 호조(戶曹)의 정랑(正郞)이나 좌랑(佐郞)을 지낸 관리들이 1550년경에 모인 계회임을 확인할수 있었다. 참석자들은 안홍(安鴻). 이지신(李之信). 강욱(姜昱). 신희복(愼希復). 유강(兪絳). 김익(金瀷). 신여집(申汝輯)등 일곱명으로 되어 있으나. 그림에는 한사람이 더 그려져 있다. 그림중 맨끝중앙에 가장 크게 그려져 있는 인물은 계원이 아닌 특별 초대손님일 것으로 믿어진다. 이계회도는 1550년경을 전후하여 일어난 계회도상의 큰 변화들을 말해 준다. 우선 계회가 야외가 아닌 옥내에서 열리고 있다. 전에없이 계회장면이 배경을 이룬 산수와 대등한 정도로 크고 중요하게 표현 되어있다. 대개 1550년 이후의 조선 중기의 계회도들은 거의 옥내에서의 모임을 산수를 배경으로 하되 크고 중요하게 묘사하거나. 산수의 비중을 줄이고 계회장면의 비중을 크게 다루는 것이 상례로 되는데. 이계회도는 이러한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하고 있다. 또한 배경을 이룬 산수의 표현에 있어서도 안견파 화풍의 일변도를 벗어나 남송(南宋) 원체화적(院體畵的)인 양식을 가미하고 있어서 또한 주목을 끈다. 이처럼 이 계회도는 1550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한 계회도의 형식상의 변화와 화풍상의 변화를 함께 말해주는 주요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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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작가미상
제목 : 연지계회도(蓮池契會圖)
언제 : 1550년경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94 x 59 cm
소장 : 국립중앙 박물관


해설 : 이계회도는 상단의 제목과 하단의 좌목(座目)이 모두 잘려 나갔고. 중단의 그림만 남아 있어 어떤 계회를 그린 것인지 확실치 않다. 연지(蓮池)를 끼고 있는 정자에서 계회가 열리고 있어. 연지계회도(蓮池契會圖)라 명명하였다. 작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화풍상으로 보아 <호조낭관계도>를 그린 사람과 동일인 임이 틀림없다. 계회도는 선비화가들은 그리지 않고. 언제나 화원 아니면 직업화가가 그리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이 그림도 그러한 사람의 작품으로 볼수 있다. 계원들의 표정을 읽을수 있을 정도로 인물이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계회 장소도 주변의 산수와 대등하게 다루어져 있다. 계원들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눈에 띄고. 중경(中景)의 안개속에 솟아오른 지붕들과 대밭이 눈길을 끈다. 이 대밭의 모습은 어딘지 이수문(李秀文)의 묵죽(墨竹) 화첩중의 제1엽에 보이는 대밭을 연상시켜 준다. 또한 근경의 연못의 모습이 대단히 시적(詩的)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16세기 중엽에 생긴 계회도의 큰 변화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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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암(李巖)
제목 : 모견도(母犬圖)
언제 : 16세기 전반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73.2 x 42.4 cm
소장 : 국립중앙 박물관


해설 : 이암은 정5품의 두성령(杜城令)에 제수되었던 세종(世宗)의 현손으로. 그당시에도 영모(翎毛)에 가장 뛰어난 인물로 손꼽혔다. 그는 매그림과 초상화에도 능통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으나. 지금까지 그의 화명(畵名)을 대변해온 것은 이 모견도 이다. 안개에 가려 윗부분이 수평으로 절단된 듯한 느낌을 주는. 한그루의 나무를 화면 상단부에 일산(日傘)처럼 배치하고. 그 아래에 어미개와 어미의 젖가슴을 파고드는 새끼 강아지들의 정겨운 한때를 담아놓았다. 성글고 거친 붓자국을 남기며 분방하게 처리된 배경의 나무는. 짙은 먹으로 도색하듯 곱고. 편평하게 훈염(暈染)하여 오려 놓은 듯한 느낌을 주는 개의 간결한 형태에 양감을 부여하고. 또 개를 그림의 핵심으로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개의 목걸이에 칠해진 붉은 색은. 화면에 액선트를 주면서 오른편 상단의 나뭇가지 밑에 찍혀있는 이암(李巖) 이라는 주문(朱文)의 향로형인(香爐形印)과 정중(靜仲) 이라는 백문방인(白文方印)이 동일색조로 시선을 유도하여 오행감(奧行感)을 조성하고. 묘사법의 심한 대조로 분리될 듯한 배경과의 관계를 연결시켜 준다. 이러한 구성과 더불어 이 작품을 보다 가치있게 해주는 것은 눈가에 하얀 테두리를 남긴 개의 순진무구한 표정. 새끼강아지들의 귀엽고 천진스런 동작들을 성공적으로 묘사한 한국적 정취가 물씬배인 온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표출이라 하겠다. 이암이 개그림을 통하여 이룩했던 회화 세계는 그의 창의력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당시 화단의 독창적 성장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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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암(李巖)
제목 : 화조구자도(花鳥拘子圖)
언제 : 16세기 전반
재료 : 족자 종이에 채색
규격 : 85.6 x 45 cm
소장 : 호암미술관


해설 : 이암은 개나 고양이와 같은 작은 동물들의 순진무구한 모습과. 아름다운 화조의 배경이 한데 어루러져 자아내는. 평화스럽고도 정감어린 분위기의 묘출을 통하여. 조선시대 영모화의 한국적 전통수립에 중추적 역활을 했다. 이 화조구자도는 그의 이러한 명성과 회화 세계의 특색을 잘 엿보여주는 수작중의 하나이다. 백도화(白桃花) 향기 그윽한 어느 포근한 봄날의 정경을. 꽃내음 맡으며 굽어진 가지위에 앉아있는 한쌍의 새. 꽃을향해 날아드는 호랑나비와 꿀벌. 그리고 나무밑에서 제각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세마리의 강아지들을 통해서 엮어놓았다. 구성도 짜임새 있지만. 가는 묵선으로 윤곽을 두르고. 그 안을 고운 설채로 메운 구륵전채(鉤勒搷彩)와. 수묵몰골(水墨沒骨)의 조화로운 대비 또한 훌륭하다. 그리고 강아지 들의 때묻지 않은 천진난만함을 강조하기 위해. 특이한 훈염(暈染)으로 형태와 빛깔을 나타냈으며. 주변의 바위에는 16세기 우리나라에서만 유행했던 단선점준(短線點皴)을 구사하여 화면의 정취를 한층 돋구어 놓았다. 일본의 화가 타니분쬬오 도 고화비고(古畵備考)에 유조선화풍(有朝鮮畵風) 이라고 특기해 놓았던 이암의 이러한 회화세계는 뒤에 김식(金埴)과 변상벽(卞相璧) 등에게도 계승되어 조선시대 영모화풍의 근간을 이루었다. 특히 묵훈(墨暈)의 음영법으로 다루어진 강아지의 귀여운 모습은 17세기 전반경에 할동한 일본의 화가 소오겐의 개그림 들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에서 한동안 그를 자기네 나라의 화가로 잘못 알고 있었고. 또 그의 그림들이 일본에 더 많이 전래되었던 사실 등은 그의 화풍이 일본 화단에 미쳤을 영향관계를 추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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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신사임당(申師任堂)
당호 : 사임당(師任堂).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齊)
제목 : 초충도(草蟲圖) 8폭중 4폭
언제 : 16세기 전반
재료 : 종이에 채색
규격 : 각폭33.2 x 28.5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로서 후세에 크게 존경받는 한국의 대표적인 어머니상을 보여준다. 높은 인품과 함께 시. 서. 화 에 두루능해 가정교육의 사표(師表)로 국문학사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회화사에 있어서도 간과할수 없는 확고한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호(號)만이 알려져 있을뿐 조선시대의 모든 여인이 그러하듯 이름은 없다.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거유(巨儒) 이이(李珥)의 율곡집(栗谷集)에 의하면. 사임당은 7세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방(倣)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밖에 여러 사람들의 문집(文集)에서 그녀의 그림에 대한 기사들을 찾아볼수 있다. 신 사임당이 즐겨 그린 그림은 산수. 화조. 어(漁). 포도. 매(梅). 난(蘭). 화훼초충(花卉草蟲)등 여러 분야에 두루 미친다. 다방면의 소재에 모두 뛰어났으나. 그중에서 그녀의 성가(聲價)를 높인 것은 포도와 초충도로 생각된다. 이 초충도들은 원래 초충도 8첩에 신사임당의 방손(傍孫)인 신경(申暻)의 발문(跋文). 오세창(吳世昌)의 발문과 함께 10폭으로 꾸며져 있다. 이 발문에 의해 전래사유를 분명히 알수있다. 일찍이 종실 출신 이양원(李陽元)이 소장하던 것을 그의 후손이 신경에게 팔았다. 그후 200년가량 지나 이용희(李用熙)교수가 소장케 되어. 이를 오세창에게 보이자 1946년에 발문을 쓴 것이다. 이 작품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초충도 병풍을 순서대로 열거하면 1)수박과 들쥐, 2)가지와 벌, 3)오이와 개구리, 4)양귀비와 도마뱀. 5)맨드라미와 쇠똥구리. 6)산나리와 매미. 7)어승이와 개구리. 8)산차조기와 사마귀 등이다. 작품명을 정하는데 있어 그림에서 살필수 있듯이. 식물도 한 가지가 아닌 두가지 이상이며. 곤충도 두 가지 이상씩이어서. 화면을 차지하는 비중에 의거하여 명명하였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삼각형이나 원형의 안정된 구도로 그려져 섬세하고 정확한 표현 그리고 선명한 채색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수작임을 두루보여 준다. 그림에 따라서는 등장된 곤충류의 형태나 포치에 있어 장식성으로 인해 소재 사이의 연결이 어색하게 보이는 점도 없지 않다. 소재가 단순해짐을 우려해서인지 도판에서 보이는 것처럼 수박이 중심이나 그 옆의 패랭이를 가미한다거나 맨드라미와 들국화 등 크기에 의해서 비중을 알수 있게끔 함께 나타냈고. 곤충들도 여러가지 각기 다른 동작을 함께 그려서 변화와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하단에서 4분의1쯤 되는 지점에. 태점(笞點)을 농담 이중으로 꼼꼼히 찍어. 지면과의 경계를 나타낸것도 개성적인 화면처리에 들 것이다. 여성 특유의 청초함이 그대로 배어나오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에서. 장식적인 화면구성이 엿보이긴 하지만. 뛰어난 묘사력과 색채감각을 보여준다.


가지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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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과 들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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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차조기와 사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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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와 개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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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정근(李正根)
아호 : 심수(心水)
제목 : 미법산수도(米法山水圖)
언제 : 16세기 후반
재료 :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규격 : 23.4 x 119.4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정근의 호는 심수(心水)이고 벼슬은 정6품 사과(司果)를 지냈다. 그의 집안은 부친 이명수(李明修) 이래로 대대로 화원(畵員)벼슬을 이어갔는데. 이명수의 두 아들 정근(正根). 정식(正植)과 사위 유성업(柳成業) 그리고 정식의 아들 수형(壽亨). 손자 홍규(泓虬). 증손 기룡(起龍). 고손 형정(衡精)등이 모두 화원이었다. 그의 화풍에 대하여 윤두서(尹斗緖)의 화단(畵斷)에 “안견을 조(祖)로 삼았고. 필법이 섬교하고 능히 멀고 아득한 것을 표현할수 있어서. 가이 이불해 보다 앞섰다고 할 만하다” 고 적혀있는데 이러한 화풍의 작품으로 설경산수도를 들수있다. 이와는 전혀 다른 양식으로 제작된 이 미법산수도는 옆으로 긴 화면안에 오른쪽 하단. 즉 근경을 농묵으로 처리하고. 담묵의 원경에 이르기 까지 완만한 대각선을 이루며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원산 윗 부분에 미불의 모옥(茅屋)에 비내리는 것을 감상하는 그림의 뜻을 방(倣)하여 남창(南窓)을 위하여 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으로 이야기함을 그렸다. 는 내용의 제발(提拔)이 있다. 길고 완만하게 대각선을 이루면서 멀어지는 구성. 촘촘한 미점(米點)의 사용. 담담하게 변화되는 묵법등에서 명대(明代) 미법산수의 영향이 엿보이고 있어. 원대(元代) 초기의 비법산수를 토대로 한국화된 15세기 말의 최숙창(崔叔昌)등의 미법산수와는 차이를 드러낸다. 남종화(南宗畵)의 지류인 미법산수가 16세기 화원에 의하여 제작된 것이 특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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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흥효(李興孝)
제목 :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언제 : 16세기 후반
재료 : 화첩 비단에 수묵
규격 : 29.3 x 24.9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흥효는 이상좌(李上佐)의 아들이며 그의형 이숭효(李嵩孝)가 일찍죽은 탓인지 당대에 더 화명을 떨친듯 하다. 그는 명종(明宗)의 어용(御容)까지 그려 군직(軍職)을 받기도 했으며. 양송당(養松堂) 김제(金禔)의 필법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이그림은 6폭가운데 맨 마지막 엽으로. 안견파 화풍 영향을 여실히 들어내고 있다. 편파구도계(偏頗構圖系)의 전통을 반영하듯. 화면의 중심이 왼쪽으로 치우쳐 있는 이그림은. 조선 초기의 사시팔경도 에서 찾아볼수 있는 구도와 공간감의 여운이 남아 있다. 근경의 소나무와 뒷편 언덕위에 늘어서 있는 침엽수가. 모두 세찬 바람으로 왼편으로 기울고 있는 반면. 성곽위의 깃발은 오른쪽을 향해 나부끼고 있어 어색한 느낌을 주는데. 이런 유형의 작품이 정형화 되어가는 면모를 엿보게 한다. 주산에 가해진 단선점준(短線點皴)은 16세기 전반의 액선트를 가한 듯한 예리한 필치에 비해. 굵고 길며 뭉툭하게 변하여 훨씬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낸다. 이 작품에 보이는 전반적인 구도나 주산의 형태. 공간감 등은 이정근(李正根)의 <설경산수도>와도 연관지어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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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작가미상
제목 : 풍악도(風岳圖)
언제 : 16세기 후반
재료 : 비단에 담채
규격 : 27.5 x 34 cm
소장 : 한국 개인


해설 : 이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전(전) 안견(안견)의 사시팔경도(사시팔경도)가운데 만도(만동) 부분을 변형시켜 재구성한 듯하며. 그보다 경물들사이의 거리가 가까워 짐으로 인해 공간감이 줄어든 것이 차이점이라 하겠다. 이러한 구성 내용은 이흥효(이흥효)의 <설경산수도> 와도 비슷하다. 그러나 상단부의 산 표면에 단선점준이 훨씬 날카롭게 구사된 점이라든지 근경의 나지막한 둔덕 표면에 피마준을 연상케 하는 필치가 보이는 점 등은 이흥효의 작품과는 다른 면모라 하겠다. 그리고 근경의 소나무를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이흥효의 <설경산수도>에 비하여 필치가 예리하고 섬세한 느낌을 준다. 15세기 이래의 안견파 화풍을 계승하여 여기에 새로운 요소들을 가미하여 전개되었던 16세기 산수화풍의 일면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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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함윤덕(咸允德)
제목 : 기려도(騎驢圖)
언제 : 16세기 후반
재료 : 비단에 담채
규격 : 15.6 x 19.2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함윤덕은 16세기에 활약했던 화가로. 윤두서(尹斗緖)의 기졸(記拙)에. 그의 그림에 대한 짤막한 평이 남아 있을뿐, 출신 배경이나 행적등이 전혀 알려져 있지않다. 유작 또한 이 기려도 한점이 유일하게 전해온다. 이그림은 유력(遊歷) 중의 기려고사(高士)를 그린 것으로. 긴여행에 지친 듯 다리를 저는 나귀와. 피어오르는 시흥(詩興)에 잠긴 선비의 단아한 모습이 대조를 보이며. 화의(畵意)의 핵심으로 부각 되어있다. 이와 같이 독립된 주제의 기려인물은. 시객(詩客)으로서의 두보(杜甫)와 소식(蘇軾)의 고아한 풍취를. 염두에 두고 그리는 경우가 많다. 짙고 옅은 먹빛으로 화면의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촛점을 이루는 인물과 나귀엔는 붉은 색과 갈색을 베풀어 강조했으나. 지금은 거의 탈색되어 묵색이 주조를 이룬다. 구성은 강희안(姜希顔)의 <고사관수도>에서 전형화되었던 소경(小景)산수인물화의 구도를 계승하며. 배경에 암벽과 덩굴나무의 부분만을 배치하는등 인물중심으로 간결하게 짜놓았다. 암벽에 보이는 길고 날카롭게 빠진 부벽준(斧劈皴) 모양의 준찰(皴擦)이라든지. 그옆 공간을 메우고 있는 자생덩굴과 나무잎의 양태 등은. 남송의 마하파(馬夏派)에서 명대의 절파(浙派)로 이어지는. 일련의 특색들을 반영하고 있는데. 화면의 맨 앞에 바위의 일부를 포치하여 전경의 공간을 한정시킨 것은 원말(元末) 이후에 나타나는 경향이다. 인물의 의문(衣紋)또한 마원(馬遠)이래의 전통을 받아들여 겨드랑이와 옷자락 부분을 방사선 모양으로 퍼지게 하였다. 그러나 시필(始筆) 부분의 노봉(露鋒)이 누에 머리처럼 더욱 두드러지면서 짧고 힘차게 삐친 주름의 필선은 중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당시의 한국적 특징이라 하겠다. 비록 편폭(片幅)에 불과한 소품이지만. 필치도 유연하고 화면 전반에 아운(雅韻)이 감도는 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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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숭효(李崇孝)
제목 : 귀어도(歸漁圖)
언제 : 16세기 후반
재료 : 모시에 수묵
규격 : 21.2 x 15.6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숭효의 자(字)는 백달(伯達)이며. 화원 이상좌(李上佐)의 아들로. 그의 동생 이흥효(李興孝). 그의 아들 이정(李楨)등이 모두 화원이었다. 이숭효는 일찍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매우 드물어 현재까지 알려진 작품은 이 귀어도가 유일한 것이다. 대각선으로 이어진 비탈길을 한 늙은 어부가. 잡은 고기를 왼손에 들고. 오른쪽 어깨에는 낚싯대를 걸머메고 돌아오는 모습이다. 주변의 자연공간은 갈대잎으로 간결히 설명되고 있고. 낚시꾼의 초연한 모습이 이 그림의 주제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산수화에서 근경의 인물부분만이 크게 강조되어. 어부도(漁夫圖).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 관폭도(觀瀑圖).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조선중기 절파(浙派) 화풍의 한 가지 특징이기도 하다. 갈대잎의 활달하고 조방(粗放)한 필치나. 굵고 가는 거침없는 옷주름의 묘사 또한. 절파 화풍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히 이 작품에서는 어부의 비척거리는 걸음거리와. 달관을 한 듯한 표정이 생기있게 묘사되어 있다. 올이 굵은 모시에 그렸기 때문에. 붓길이 매끄럽지 않은 대신에. 끊긴듯 이어지는 여운은 더 잘 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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