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말은 대화를 들어보면 “나”를 어떻게 지칭하느냐에 따라 대화의 상대자의 신분(지위)을 짐작 할 수 있다. 친구 사이나 연령이 비슷하면 “내가 이렇게 했다.”라고 하지만 자기보다 나이가 위거나 어른한테는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표현한다. 자신의 말을 듣는 상대의 호칭도 “나”라고 했을 때와 “저”라고 했을 때는 달라진다. 어감을 살려 주려면 “내가 했다.”라는 것이 “내가 했습니다.”보다는 귀에 거슬리지 않게 된다. 오히려 “제가 했습니다.”가 어감을 살려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고, “제가 (형)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표현한다.
대화를 잘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어떻게 지칭(내가, 제가) 하느냐가 중요하다.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이 한 사람이면 간단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넘으면 “나”를 어떻게 칭하느냐가 문제다. 상대가 나보다 윗사람과 아래 사람이 섞여 있으면 말을 높여야 할지 아니면 놓아야 할지 어중간하다. 물론 공식적인 연설을 한다면 간단하지만 비공식적인 사담인 경우는 말이 올라갔다(경어) 내려갔다(반말)하게된다.
어떤 경우는 나보다 나이가 아래인 사람이 트집(?)을 잡을 때 무어라 변명을 해야한다. 변명을 하기 전에 그 트집이 나이 어린 한 사람의 생각이라면 “내 잘못이 아니야!”라고 간단하게 하면 된다. 그러나 주위의 나보다 나이가 위인 사람들도 마음속으로는 나를 트집 잡고 있지만 표현을 안하고 있을 때가 있다. 이런 상황엔 그 트집이 비록 어린 사람의 입에서 나왔지만 대답은 같이 있는 모두에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대놓고 “제가 무어라 했습니까?”라고 하면 주위 사람들은 슬쩍 핑계 대기를 우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발뺌을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한테 직접 “소리”를 낸 손 아래 사람에게 만 “내가 언제 무어라 그랬니?”하면 조금은 시원치 않은 느낌이 여전히 남아 있다. 분명 그들도 “침묵의 소리”를 했을 텐데 말이다. 이럴 때는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어감과 표현을 “예술적”으로 사용하면 자기의 심기 불편함도 보여주고 오해되었던 부분을 이해시킬 수 도 있다. “제가 언제 너 보고 뭐라 그랬습니까?”
위의 우리말을 문법적으로 분석하면 잘못 된 점이 없다. 그러나 우리말이 갖고 있는 “화자;말하는 사람”과 “청자; 듣는 사람)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위와 같은 문제성(?)의 답변을 통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문제(?)삼아 트집 잡은 것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겠다.
“제”가 라고 했으니 듣는 쪽은 분명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향하는 것이겠지만 “너”라고 했으니 상대를 지목했기에 대답은 문제(?)를 직접 야기 시킨 사람에게 했다. 이렇게 문제성의 답변을 통해 간접적으로 모두에게 자기의 입장을 밣힌 셈이 된다.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감정이 섞인 어투로 노출하면 괜시리 감정 대립으로 치닫게 된다. 그렇다고 있는 감정을 삭이지 않고 묻고 있으면 쌓이게 되어 엉뚱한 곳에서 화산이 폭발하듯이 묵은 감정이 터지게 된다. 감정이란 그때그때 풀어야 한다. 우리말의 “아”다르고 “어”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제가 언제 너 보고 무어라 했습니까?”를 잘 활용하면 묵은 감정이 있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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